안중근 의사 일생
1879년 09월 02일 황해도 해주에서 부 안태훈, 모 조마리아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고,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가운데 응하여 태어났다'라는 뜻으로 아명을 응칠이라 지었으며, 아명인 동시에 자로 사용하였다.
종교는 천주교로 세레명은 토마스로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다고 한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지만 성장하면서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사격의 명수로 놀랍게도 기계로 쏴도 명중률이 고작 50퍼센트인 화승총으로 20보(10m)나 되는 곳에서 놓인 동전을 맞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인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 씨 집안의 총 잘 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고 한다.
1904년 홀로 평양에서 석탄상을 경영하였으며, 바로 다음 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를 세웠고, 이어 남포의 돈의 학교를 인수하여 인재양성에 힘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아 합법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세울 수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1907년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하여 일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싸움에서 지고 물러났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을 불사하여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였으며,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그 해 10월 침략을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동지 우덕순과 함께 거사하기로 뜻을 같이하였으며, 동지 조도선, 통역 유동하와 함께 이강의 후원을 받아 행동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D-DAY
1909년 10월 26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는 차이쟈거우 역, 안중근은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하얼빈 역에 조를 나누어 매복하였다.
하지만 차이쟈거우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하였고, 기차는 그대로 운행하여 하얼빈 역으로 정차하였다.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들 뿐이었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하였을 땐 많은 수행원들이 같이 있어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어 어려운 상황에 놓였지만,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던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봤으며,
그 덕분에 안중근 의사는 이토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총(FN M1900)으로 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총 3발을 쐈다.
총을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열차 안으로 옮겨졌지만 저격당한 지 30분 만에 사망했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는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에 각각 1발씩 맞췄다.
총알이 1발 남았을 때 안중근 의사는 체포가 된다.
원래대로라면 러시아에서 수완을 쌓은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으면서 제 삼국인 러시아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았어야 했지만, 일제의 압력으로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중국 뤼순에 위치한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었다.
2월 14일 마나베 쥬조 재판장은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어 32세에 순국하였다.
본인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총살형을 일제에 요구하였지만, 일제에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간주하여 교수형을 집행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마지막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순국한 후 동생들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 당국은 안중근 의사의 묘지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하고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끝끝내 넘겨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집필한 '동양평화론'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또한 1970년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5가 471번지에는 기념관도 건립되었다.
안중근 의사 관련 대중매체 (연극)
- 1981년 '한만선' (배우 최상설)
- 1996년 '제국의 광대들' (배우 차기환)
- 1998년 '대한국인 안중근' (배우 김갑수)
- 2005년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배우 원석연)
- 2010년-2014년 '나는 너다' (배우 송일국)
안중근 의사 관련 대중매체 (드라마)
- 1979년 '대한국인' (배우 김흥기)
- 1984년 '조선총독부' (배우 한영수)
- 1990년 '왕조의 세월' (배우 안병경)
- 1995년 '김구' (배우 한범희)
- 1996년 '안중근' (배우 이일재)
안중근 의사 관련 대중매체 (영화)
- 1959년 개봉한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배우 전창근)
- 1972년 개봉한 영화 '의사 안중근' (배우 김진규)
- 1979년 개봉한 북한 영화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쏘다' (배우 리인문)
- 2002년 개봉한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배우 오세헌)
- 2004년 개봉한 영화 '도마 안중근' (배우 유오성)
- 2022년 개봉한 영화 '영웅' (배우 정성화)
- 2023년 개봉한 영화 '스위치' (배우 권상우)
- 2023년 개봉할 영화 '하얼빈' (배우 현빈)
안중근 의사 관련 대중매체 (뮤지컬)
안중근 의사의 삶을 토대로 만든 국내 창작 뮤지컬 '영웅'
관련 대중매체 중 가장 대표적인 매체이다.
2009년 10월 26일에는 안중근 의사 사망 100주기를 기념하여 후손들의 참관하에 초연되었다.
안중근 의사 명언
-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는다.
-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해 보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